한국의 축구는 대한체육구락부와 같은 사회체육단체와 학교체육을 중심으로 확산

19세기 후반, 근대적인 축구가 도입된 이후 한국의 축구는 대한체육구락부와 같은

사회체육단체와 학교체육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다양한 체육구락부나 축구단 등 사회인 축구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부분 당시에 고등교육을 받았던 사립학교 출신들이 졸업 이후 축구팀을 창단했기 때문이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경우에는 서양선교사에 의해 창단되었으나,

대한체육구락부의 경우에는 한성외국어학교 출신들이 모여 만든 순수한 체육단체였다.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외국어를 전공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왕실의 통역 관련 관리로

선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 비해 국제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한 근대화와 스포츠 보급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대한체육구락부를 창단하여 활동한 이유 또한 축구를 통해 선진 문화와

스포츠의 가치를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하는 것은 체력과 민주시민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김형회, 2000: 6-8).

또한 대부분 왕실의 관료로 활동했기때문에 직․간접적인 정부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며,

정부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제의 견제를 받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대한체육구락부는 순수 체육단체였지만 축구 경기를 치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다.

특히 그들이 만들어 부른 운동가(노래)를 살펴보면 궁극적인 활동목표가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청년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우정과 용맹을 발전시켜 황제를 중심으로 한 문명국으로

나아가자는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축구를 통해󰡐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고 궁극적으로는 애국을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대한체육구락부의 운동가(運動歌)가 사회 속에 퍼지면서 당시의 학교 운동회나 연합 운동회에서도

운동가가 만들어 졌는데 그 내용은 일제에 대항하는 의지를 표명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대한체육구락부의 활동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축구를 통해 구국의 의지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펼쳤던 대한체육구락부는

일제의 탄압 속에 1907년 5월 26일 마지막 축구대회를 끝으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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